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에바노트] 내 선택은 언제 시작되었고, 지금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나

선택
Choice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넌 꿈이 뭐니?
그 다음엔 뭐할거니?



선택.

오늘 문득, 내 삶에, 나는 언제부터 선택을 시작했는가 돌아보았다.
의식의 흐름은 이러했다.
지난 주에 동아리오빠가 밥을 사주었는데
나는 메뉴 중 가장 고기가 안들어가는, 오징어볶음을 시켰다.

나는 얌체같이 채식중이라며 오징어만 빼고 먹었다.
해물에 대해 생각하자,
내가 10살 때 미국에서
다른 가족들이랑 다같이 해산물로 유명한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 그 때부터 였다.
미국에서 아빠는 나에게 작은 선택권들을 주셨다.
가령 외식을 할 때 내가 메뉴를 정하거나,
가족끼리 관광을 하고 나서
기념품가게에 들어가서 기념품을 하나 고르라고 하신다거나,
독사진을 어디서 찍고 싶냐던가.

아니, 그럼 그 이전에는 선택권이 없었느냐고?
10살 이전까지는 부모님과 외출을 해본 적이 많이 없었다.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셨다.



일단 밥 먹을 때 그랬다.
아빠의 영어 과외선생님과 식사를 했다.
(아마 이 식사가 외국인과 우리 가족이 식사한 유일한 자리일 것이다.)
그 때 메뉴에서 나는 Smile Pancake를 시켰다.
팬케이크에 체리, 시럽 따위로 얼굴이 그려져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웃는 얼굴의 귀여운 팬케이크가 마음에 들어
그것으로 시켰다.

하지만 체리는 너무 강해 내 입맛에 맞지 않았고,
결국 대부분을 남겨야 했다.
이 때 아빠는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나는 또, 분홍공주님이었다.
아니, 분홍색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색이었다.
그런데 TY인가, 동물 인형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있는데
제일 먼저 산 동물이 하얀 쥐, Cheezer였다.
정말 귀엽고, 그 보슬보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촉감이 좋았다.

나는 그 치저의 집을 지어주었다.
김 박스에 침대를 놓고, 책상을 놓고,
치저의 귀저기와 담요를 바느질해 직접 만들었다.
그 때 모든 것을 분홍색으로 꾸밀 수 있더라.

나는 여행을 떠날 때 치저의 귀저기며, 여행가방을 꾸렸다.
그때, 어? 나도 분홍색만 입을 수 있나?
생각하며 모든 분홍색 옷들만 챙겼다.
분홍 여행.
그 여행 때 입은 모든 옷은 분홍색이었다.

그 때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풍경 속에 조금이라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밋밋하기까지 한 풍경 앞에 자리했다.
그러면 아빠는 핀잔을 주셨다.



"아무것도 없는데. 참.. 얜 특이해."

서부 마을에 놀러가서, 그저 나무집이기만 한 집 앞에서 찍은 것,
부찻 가든에 놀러가서, 원두막 아래 어두운 데서 찍은 것.
-이 원두막에 들어갔을 때 기둥에 낙서가 되있는 것을 보고
나는 바로 또 '여긴 아니야' 생각이 들었다.

"얘는 여기 그늘져서 어두운데. 참.. 특이해."

기념품을 고를 때도 그랬다.
캐나다 기념품가게 였는데, 나는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잎이 무지개색으로 겹쳐지는 열쇠고리를 골랐다.
그 열쇠고리가 상당히 비쌌고, 다른 가족의 딸인 빛나는
비교적 실용적인 미니 손전등을 골랐기에
아빠는 다시 한 번 핀잔을 주셨다.

"얘는 이걸 왜 골랐는지 모르겠어. 비싸기만 하고. 실용성도 없고."

나는 반항심에 분명 아빠에게 "필요하다구요!"라고 말하며
입을 씰룩 거렸을 것이다.
묵직하게 내 손 안에서 빛나는 열쇠고리가
내 마음에도 묵직하게 무게를 지웠다.

.
.
.
다시 기억의 실마리가 된 해산물집으로 돌아와서.
랍스터가 유명한 집이었다.
우리는 그 날 인생에서 유일한 것으로 기억하는
랍스터를 먹었다. 아니, 난 먹은 기억이 없고, 다른 사람들은 먹었을 것이다.
나는 남기고 나서 아빠께 핀잔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양이 제일 적어 보이고,
내가 맛없어서 그만 먹지 않게 그래도 친숙해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내 앞에는 감자튀김과 돈가스와 같은
매우 단순한 음식이 놓여졌다.
맛은, 생긴 그대로의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나는 그 날 아버지가 내 선택에 칭찬을 해주셨던 것이 떠오른다.
정작 나는 그리 맛있는 식사는 아니었는데
.
.


이 사건들이 있은 후
10살의 나는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인지한 것 같다.
선택을 잘 했을 경우에는 칭찬을 받고, 주위사람들과도 하하 웃을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팬케이크)
내가 그것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면 (남기면)
그것은 잘한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남들이 보기에 잘한 선택은
선택을 잘 하고, (평범한 음식. 내가 다 먹을 수 있겠다)
끝까지 마무리도 잘 하는 것이다. (다 먹는다.)

하지만
25살 나의 선택은
선택을 '잘 하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 잘한 선택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은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선택하는 거다.
메뉴를 고를 때에도 익숙한 음식을 고르지 않고,
이름이 낯설거나, 설명을 들어서는 도무지 어떤 음식인지 감 잡을 수 없는 것을 시킨다.

요즘 누가 물어보면,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언어 배우면서, 일하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

그래서 계획은 있고?
아뇨 없어요.

새로운 나라에서 가서, 새로운 일을 할거니까 저도 모르지요.
20대의 나는, 그렇게 여러 나라에서 여러 경험을 쌓다가
30대가 되어 점차 장기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칠 선택들을 해나가고 싶다.
결혼이라던가, 직장이라던가.

나는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 때 아부지께 전화가 왔다.


25살의 나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솔직한 내 생각을.
내 선택을.

내가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해 걱정하시는 아버지께

채: 아빠, 제가 언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그 언어의 실용성 때문이라기보다
그 언어 자체의 매력 때문이에요.

아빠, 저는 제가 20대일 때 많은 언어를 배워두고 싶어요.
마치 땅따먹기처럼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라도 일단 사두는 거에요.
그리고 30대에는 그 곳에 하나하나 제가 풀을 심어가면 되잖아요.

아빠, 저는 멋대로 사는게 아니에요.
저는 제 삶에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저는 제 삶으로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보여줄 거에요.
정말 다른 사람의 롤모델이 될 거에요.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은, 저는 제 삶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제 나이 때 열심히 고생하고,
제 스스로 이 세계가 어떤지 직접 살아보고 싶어요.

엄마는 옆에서 '너 아빠한테 혼난다' 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내 선택이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대견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랑 22분의 통화 후에 카톡이 왔다.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네 스스로.
아빠 엄마는 그림자처럼 따라 가며 응원할테니.'

난 참 멋진 부모님을 두었다.



나의 길을 간다.
내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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