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히브리어 수업. 굳이 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히브리어 수업 덕분에 나는 이스라엘에 한 달 더 머무르는 결정을 내린다. 엄마는 히브리어 수업을 듣고 싶은 내 마음을 헤아려주시고 당신의 노후자금으로 쓸 돈을 덜어 내 수업료를 지불해주셨다. 1달 더 머물면서 아낀 생활비로 나는 이후 덤으로 동유럽 여행까지 갈 수 있었다.
자, 정말 히브리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최초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현대 히브리어를 다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2000년 사이 만들어진 발명품 혹은 새로운 개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마치 아담이 태초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주듯, 유대인들은 '컴퓨터' '아이스크림'과 같은 외래어표기 대신 자체적인 단어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어찌보면 많은 수고가 들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새로 생겨나는 발명품에 그들이 붙이는 이름을 보면, 그들의 사고방식을 헤아릴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되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는 나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된다.
가령, 막셰브는 컴퓨터라는 뜻인데, 호세브는 생각하다 라는 뜻이다. 즉 생각하는 기계가 바로 컴퓨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즈만은 시간이라는 뜻인데, 라아아즈민은 초대하다 라는 뜻이다. 즉 당신의 시간을 내어 우리 집에 모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선생님 두 분 중에는 아주 공주님같은 할머니 선생님이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은 내가 여기서 '할머니'라고 칭한 것을 아시면 매우 고개를 흔들며 매우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보실 분이다. 아무튼 이 할머니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늘 한 히브리어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해주시고 우리의 감탄하는 표정을 보며 매우 흐뭇해 하셨다. 이 할머니 선생님은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아주 많이 갖고 계셔서 학생들을 자주 삼천포에 빠뜨리곤 하셨다.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가 삼천포에 빠졌다.)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은 우리에게 당시 팔레스타인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암살된 이스라엘의 한 장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생님은 그 당시 뉴욕에서 공부하고 계셨는데, 죽은 장관의 친구였다. 선생님은 뉴욕에 있는 그 부모님께 친구의 죽음을 전달하기 위해 착잡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차를 타고 그 집에 방문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우리 역시 숙연해졌다.
인기가 아주 많았던 공주님 같은 할머니 선생님 말고도 다른 선생님이 계셨다. 아주 단호한 성격의 이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많은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 선생님을 그리 많이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선생님께 늘 감사했다. 선생님은 늘 수업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셨기 때문이다.
[초록색 노래를 배운 날. 가사에 나오는 형용사가 전부 초록색이었다.]
가령, 초록색 노래를 배울 때는 그 노래 유튜브 영상을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고, 미술작품에 대한 본문을 배울 때에는 직접 프린트 해오신 10개 남짓의 미술작품을 교실 벽에 붙이시고는 마치 우리가 미술관에 온 듯 자유롭게 히브리어로 대화를 나누어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 다음엔 늘 우리가 앞에나와 히브리어로 역할극을 했는데, 학생들의 성격이 드러나는, 웃음이 가득찬 시간이었다.
[히브리어 반배정 시험을 친 날. 맨 앞에 노란 스웨터를 입은 레티선생님]
하지만 히브리어 선생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레티 선생님이다. 레티 선생님은 모로코 계 유대인으로 약간 검은 피부와 검은 눈동자를 갖고 계셨다. 폭탄이 터진 듯 잘게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늘 반묶음으로 묶고, 늘씬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다니셨다. 눈을 부라리며 문법을 설명하시다가 학생들이 조급하게 질문을 던지면 "레가!(기다려)"라고 외치시다가도 흡족한 대답을 들으면 품위있는 미소를 짓는 분이셨다.
나는 그리 좋은 학생이 못되었다. 종종 수업에 늦기도 하고, 업무를 핑계로 숙제를 안 해오는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수업에 대한 준비보다 내가 히브리어에 가지는 열정을 더 높게 사셨다. 내가 필기한 발음에 해당하는 뜻이 무엇인지 여쭤보면 늘 상냥하게 대답해주셨으며, 내가 히브리어 문장의 조사에 동그라미 표를 쳐서 주어나 동사와 헷갈리지 않게 구분하는 것을 보시고 드러내서 칭찬해주기도 하셨다. 선생님의 칭찬으로 나는 늘 히브리어 수업에 가는 것이 즐거웠고, 또 자신감도 생겼다.
레티 선생님은 우리에게 늘 필요량보다 더 많은 단어들을 가르쳐주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만으로 문장을 활용해서 만들 수 있도록 격려하셨다. 또 한 가지, 학생들의 성향을 매우 존중해주셨다는 점이 좋았다.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흔히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아쉬운 점을 불평하듯이 늘어놓으실 때가 있는데, 레티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의 성향마저 끌어안은 느낌이었다. (이 부분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독립심을 강조하는 이스라엘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인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주말에 여기 저기 놀러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으며, 오히려 집에서 쉬었다고 하면 안타까워하셨다. 월요일 첫 수업의 시작은 늘 주말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선생님께 히브리어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선생님께 설명해야 했는데, 나는 여기서 간간히 튀어나오는 단어를 받아적곤 했다.
지금도 간간히 나는 기억나는 히브리어로 '아니 홀레헷(나는 걷고 있어)' 중얼거리곤 한다.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을 기억하는 소중한 열쇄라고 생각한다.
레티선생님 때부터 2개월 간 같이 공부한 히카루.
아직도 페북으로 간간히 히브리어로 소식을 주고 받는다.
내 히브리어의 숨은 공신들.
정면으로 보이는 룸메인 슐라미트, 브라질에서 온 다나,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예쁜 공주 마리.
정말 내 히브리어를 많이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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