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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3월 마지막 날. 중국에서 일하면서 달라진 점



3월 마지막 날 
중국에서 일하면서 달라진 점


상하이에 온지 2개월 하고도 2주가 지났습니다. 상하이에서의 직장생활도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저에게 있었던 변화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첫째로, 졸지 않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점심을 먹으면 당연히 졸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턴생활을 하면서도 고치지 못했던 버릇인데, 중국에 와서 그 버릇을 고쳤습니다.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포장문화 덕분입니다. 예전에는 밥을 남기기가 아까워서 배가 불러도 꼭 다먹었었는데, 이제는 점심을 먹으면 반드시 조금은 남겨서 싸간 다음 저녁으로 먹고 있어요. 덕분에 맑은 정신으로 점심 먹은 후에도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테크노드 메인. 캡스톤파트너스 기사와 마이리얼트립 기사가 보입니다^^

둘째, 기사를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어요.
작년에는 정말이지 변비걸린 사람처럼 기사 하나 쓰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에 처음 와서도 하루에 기사 한 편을 쓰는 것이 어려웠어요.

그 버릇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시간, 영어 실력에 대한 욕심을 버린 덕분입니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욕심이 많아서, 이것 저것 다 넣으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기사도 길어지고,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점점 더 속도가 느려지고 질질끌게 되었어요. 그런데 테크노드 전사회의 때 영어 기사의 길이를 줄여달라는 위팅의 발표를 듣고, 기사량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요즘에는 word카운트의 350자 ~ 400자에 맞게 쓰고 있어요. 정보 제공 욕심 때문에 더 길어지면 600자가 넘을 때도 있지만요.

제가 처음으로 쓴 영어기사는 2013년 12월 31일에 Geektime에 쓴 것이고, 두 번째 기사는 2014년 11월 30일에 TechNode에 쓴 것입니다. 써본 기사량이 적은 만큼 제가 쓰는 어휘나 어법에 대해서 실력이 부족하다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다른 기사들의 세련되고 깔끔한 표현들을 보면서 뒷골이 서늘해지거나 마음이 풀썩 가라앉는 경험을 종종 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표현들을 돌려가면서 짜깁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조각보옷을 깁는 양 문장문장에 욕심을 내다보니 속도도 느려졌습니다. 그런데 스피드가 더 중요함을 많이 느끼게 되면서부터,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중요한 것은 제가 인터뷰이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을 제 입으로, 제 목소리로 편하게 풀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이 창업가와 이야기할 때 감동을 받은 부분, 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느낌표를 가져간 부분이 어디였는지 기억합니다. 제 방법은, 그 감동 그 마음 그대로 일단 다 적어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쓰고 싶은 글의 뼈대를 잡은 다음, 회사 홈페이지의 올바른 표현이나 다른 기사들을 참고하며 제 표현을 바로 잡습니다.

여기다 회사의 PR담당 분들, 마지막에는 영국의 Mike Cormack이 검토를 해주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런웨이에 올릴 만한 글이 나오게 됩니다. 마이크가 수정한 부분과 제 원본 기사를 비교하면서 영어공부도 하고 있어요. 언젠가는 제 글이 테크크런치 기자의 수준이 될 만큼 그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이제는 개방적인 테크블로그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 기사 하단에는 제 이메일이 있어서 스타트업이나 관련 조직에서부터 저에게 기사 의뢰를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은 저를 친근하게 Eva라고 부르며 제 기사에 대한 평을 해주고, 자기 회사 서비스 링크를 달아 제 코멘트를 부탁하거나, 흥미로운 기사 제안, 산업 전반적인 전문가와의 인터뷰를 의뢰합니다. 상하이에 있는 경우에는 아예 그 회사에 방문하기도 해요.

완성된 기사 한 편을 레스토랑의 요리라고 비유하면요, 이런 이메일 문의는 마치 장을 보면서 야채들과 대화를 하는 느낌입니다. "조금 덜 익은 것 같은데, 나중에 좀 더 무르익으면 사갈게요."라고 말이죠. 물론 제철이 된 채소의 경우에는 오오오!를 연발하며 요리를 시작합니다. 아예 저한테 요리를 해서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보도기사 전달) 이 경우에는 저희 쉐프님이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저희 쉐프님이나 다른 요리사들의 추천이 있을 때에만 요리로 내놓고 있어요. (다음카카오 케이큐브 벤처스 합병 기사, 비네이티브 투자 유치 기사가 그 경우입니다.)



셋째, 중국어가 조금씩 늘고 있어요.
중국어는 아직도 제가 많이 반성을 하면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전에는 말하기 전에 영어로 할 수 있는 말과 중국어로 할 수 있는 말을 구분해서 했었는데, 이제는 중국어로 말을 그냥 막 던지고 있어요.

중국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중국에 온지 2주만에 아이폰6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 핸드폰인 Meizu를 사게 되었는데, 한글이 안 써지더라고요. 그래서 카카오톡도 안 쓰고, 네이버 사전을 대체할 영한사전을 찾게 되었어요. 영어, 중국어만 쓸 수 있는 가운데, 일기도 중국어로 쓰기 시작했어요.

가령 둔황에 혼자 여행하다가 제 여권을 보고는 중국인이 아니면 민박집에 묵을 수 없다며 밤 10시에 경찰서에 간 적이 있어요. 결국 외국인을 숙박할 수 있는 4성급 호텔에 더 비싼 돈을 내고 묵어야 했습니다. 그 때의 섭섭한 마음을, 여기는 중국이니 중국인 친구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로에서 뺨맞았으면 종로에서 눈 흘겨야 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날 덤덤하게 경찰서에 간 일기를 썼습니다. 이렇게 일기를 써서 위챗으로 보내면 제 과외선생님인 세실리아가 글을 교정해줍니다. 중국어 블로그 LOFT에 올렸습니다만, 괜스레 경찰서에 갔다는 얘기를 해서 다들 제 걱정을 할까봐 위챗 모멘트에는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서에 간 바로 다음 날. 사막을 보러 둔황에 왔고, 마침내 사막을 보았습니다. 고진감래.

오늘 친구 둘 앞에서, "케이트가 내 왼손에 헤나를 그려주었는데, 한국인들이 모이는 독서토론 모임 뒤풀이에서 어른들이 내 헤나를 보지 않도록 하면서 술을 마시느라 아주 혼났어." 라는 말을 제스처와 함께 설명하는데, 친구들이 알아듣고는 하하 웃었습니다.

중국어를 하면서 가장 기쁠 때는 친구들이 제 말을 알아듣고, 제 개그에 웃어줄 때에요. 제 동갑인 남자애가 저한테 영어로 말하면 제가 도도하게 "중국어로 말해줄래?" 하면 친구들이 제 말투 듣고 킥킥 웃거든요. 회사에서 분위기메이커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넷째, 규칙적인 생활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외로움 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정말 잘 빠지는 병인데, 이 때 시계가 9시 이내라면 어김없이 술친구인 정연이에게 전화를 걸곤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럴 일이 없어요. 아니,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규칙적인 팻말들을 놓을 수 있게 되었어요.

퇴근하고 나서 바로 댄스수업에 가거나, 중국어 수업을 잡아두어서 외롭다는 감정에 쏟을 에너지를 활동으로 발산하고 있어요. 한 번도 제 선택사항에 없었던 '그림 그리기'라는 취미가 생기면서 정말 좋은 스트레스 해소제가 되었어요.

기분이 몹시 안좋을 때, 그나마 글을 써서 좋은 글이 나오면 좀 나은데,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지거든요. 그림을 그리면 생각이 없어지고, 제 감정을 이입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외로울 때는 외로운 소녀 그림, 애정이나 관심에 목마를 때는 사랑을 독차지 하는 여자의 그림, 제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을 때는 원색의 강렬한, 자신감이 넘치는 여인 그림을 선택합니다. 이 그림을 똑같이 캔버스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못 그리고 잘 그리고는 안중에 없어요. 제 감정을 써내려가는 것에 있어서 밉고 고운 것이 있을리 없으니까요.



다섯째, 혼자 재미있게 사는 법.
집에 혼자 살고, 또 출장이 자주 있다보니 집이 허하게 느껴지는 적이 많았습니다. 침대가 좀 큰 편인데, 저는 그 침대의 구석 1/3에 방석 두 개만한 전기장판을 깔고, 최대한 전기장판에 밀착하여 차렷해서 자거든요. 이런 환경이라면 혼자 공부를 하고, 일을 더 하는 데 시간을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다른 생각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있지만, 사람은 무척 다채로운 무지개색깔 같은 존재라서 일이나 공부만 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 아니며, 그 능률도 매번 100%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중국은 제가 네 번째로 혼자 사는 나라입니다. 영국 3개월, 이스라엘 7개월, 미국 3개월, 그리고 중국. 이스라엘에서 일만 하면서 살아봤는데 정말 인간이 피폐해진다는 것, 일의 능률도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반대로 주말에 여행을 다녀오거나 잘 쉬면, 월요일에 더 일에 잘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그러한 가운데 혼자 놀기도 물론 할 수 있지만,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즐거운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저만의 보증수표 3종이 있어요. 에어비앤비 (Airbnb), 카우치서핑 (Couch Surfing), 그리고 밋업(Meetup)입니다. 회사에 절친도 위팅, 카페 -가 있긴 하지만, 그 친구들은 상하이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제가 놀러가자고 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까요.

카우치서핑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이미 중국에서 세 번 해보았어요. )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왕카이, 레이나, 로렌스) 밋업은 주말의 빈 칸, 평일에 빈 칸에 종종 채워넣습니다. 그림 그리기 밋업, 근교여행 밋업, 연극 밋업에 갔었고 좋은 친구들도 덩달아 사귀게 되었어요.



지난 주말에는 케이트, 세게이 - 러시아 커플을 집에 묵게 해주었어요. 알고보니 세게이가 러시아에서 스타트업 창업가더라고요. 러시아 사람들이 중국어를 쉽게 공부할 수 있는 Laoshi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엑셀러레이팅도 받았답니다. 이 친구들에게서 러시아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되었고, 같이 등산도 나갔으며, 케이트는 제 손등에 헤나도 그려주었습니다. 작년까지는 정말이지 주변에 구차하게 신세를 사는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호스팅을 하니, 베푸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아, 이제 내가 베풀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여섯째, 제 매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해요. 당황하셨죠.)
작년에 윤모언니와 대화가 생각나요. "언니 저는 제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매력은 말야, 계속해서 노력을 쌓아가면 자연스레 생기는거야."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작년 12월부터 1.5달에 한 번은 미용실에 가고 있어요. 오늘은 최고의 날이니까,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거울을 보았을 때 씩 웃을 수 있는 것에서 멋진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제 스타일이나 매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 회사 안에서도 저만의 분위기를 풍기게 된 것 같아요. 아직 일적인 부분이나 중국어 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엠마, 위팅, 카페에게 질문하는 적도 많은데, 고마움을 표현할 뿐 질문을 한다고 해서 눈치를 보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항상 제가 갖고 싶어하던 '당당함'이라는 단어를 갖게 되었어요.



이 글에 다루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댄스수업, 여행, 독서토론 이야기 들인데, 종종 하게 되겠지요. 이제 밤 10시가 되었으니 집에 가야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중국 온지 한 달. 유럽 배경의 중국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 네 가지 (중국의 문화대혁명,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



중국의 멜로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 세 가지

有一个地方只有我们知道

이제 중국에 온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어요. 
저는 1월 10일 토요일 오후 4시에 베이징에 도착했고, 
2월 10일 화요일 오후 4시에는 상하이 사무실에서 
한창 비트윈 기사 작업을 마치고 숨을 돌리고 있었지요.


상하이 사무실.
햇빛이 쏘는 저 자리에서 일합니다. 



"잠자기 밥먹기 움직이기 등, 생활에 규칙적 리듬이 있어야
몸과 맘의 감기가 안 걸린다." 

감기가 걸린 것은 맞습니다만
생활에 규칙적인 리듬은 나름대로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규칙적인 리듬을 깨는 일이 있었어요. 
퇴근하고 문화센터에 갔는데, 오늘 수업이 없다고 하는 거에요. 
제가 지난 번 중국어를 잘 못 알아들은 탓이지요, 뭐. 

그 길로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지난 주에 봐두었던 영화관에 가기로 했습니다. 


때는 6:10 p.m.

에바: 저기, 제가 제일 금방 볼 수 있는 영화가 뭐에요? 
종업원: 이거에요. 嘲笑鸟.
에바: 음.. 중국영화인가요? 포스터 좀 보고 싶은데.
종업원: 포스터 없어요. 미국영화에요. 
에바: 네... 이걸로 주세요.

저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일단 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이 영화 관람.

아.. 내가 중국 멜로 영화를 골랐었네. 하면서요.

집에 와서 표에 적힌 제목을 찾아보니...
嘲笑鸟는 Mockingjay


어라.. 내가 본 영화는 이게 아닌데..

제가 본 영화는



이 멜로영화 였거든요. 
아... 내가 상영관을 잘못 들어갔구나...
그제야 알았습니다.
어쩐지.. 영화가 90분만에 끝나더라구요..ㅋㅋ

그래도 이 중국 영화를 본 게 원래 봤어야 했을 미국 액션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달 계획 중 하나였던 '중국 영화 보기'도 달성했으니까요. 

중국 멜로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 세 가지

하나, 영어, 중국어 자막을 둘 다 깔아주는구나. 

지난 번 <호빗>은 영어니까 당연히 중국어 자막이 들어갔는데, 오늘 중국 영화는 배경이 프라하인만큼 영어, 중국어가 다 나오는 영화였고, 영어, 중국어 자막을 다 깔아주더라고요. 
덕분에 중국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영화가 수많은 중국어 학습자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서로 추천할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둘, 멜로 영화에도 중국인 특유의 웃음 코드가 들어가는구나. 

중국인의 호탕한 성격 때문에 멜로 영화에서 나름의 슬프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했다가도 대사에 웃음코드를 넣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과 대화에서
"아빠는 더이상 엄마한테 돌아오지 않으실거에요."
"뭐?"
"그러니 엄마도 남자친구를 사귀세요!"

라던가

의도인지 아닌지 모를, 연인을 붙잡기 위해 뛰어가는 남자의 바지가
반바지라던가. 

또 마지막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NG장면들을 모아서 보여주는데, 방청객 웃음을 효과로 넣더라구요. 그 방청객 웃음이 이 영화 전체의 옥에 티라고 생각될 만큼 매우 낯설었습니다. 


셋, 중국 그리고 체코 공산주의의 과거와 지금.

영화 내용과 공산주의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중국공산당, 그리고 작년 프라하에 갔을 때 방문했던 프라하의 공산주의 박물관이 묘하게 겹쳐지더라고요. 1989년은 중국과 체코 두 국가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는데요, 중국의 민주화 운동의 대표로 꼽히는 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났고요. (정확히 1년 후 제가 태어납니다.) 체코의 경우는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붕괴하였고, 이듬해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거든요.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을 휩쓴 개혁, 개방 물결 속에 1989년 벨벳 혁명으로 다당제가 도입되고 공산정권이 붕괴되었고 1990년 4월 1일 공식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변경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명칭은 사라졌다.
한편, 이후의 체코 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은 1992년, 각각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할 것을 결의하여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소멸하고 두 독립국인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나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찾아보니 제가 프라하 공산주의 박물관 포스팅을 해놓은 게 있었네요. 
2014년 2월 22일 작성한 것입니다. 

[에바노트 / 유럽 거닐기 ] 체코 프라하 - 체코의 암흑기를 보여주는 공산주의 박물관


포스팅 중에서.

'벨벳혁명'이라 부르는 까닭은 부드러운 천인 벨벳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벨벳혁명 [Velvet Revolution]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벨벳혁명에서 정말 국민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까.
내가 이 박물관의 상영관에서 본 영상에서는
구타 장면과 폭력적으로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장면이 가득했는데.

영상에서 한 밴드가 노래를 부른다.
영상으로는 체코 시민들이 경찰에게 구타당하고 피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프라하. 지금 내가 관광하는 이 도시가 25년 전에는 시민들의 데모와 자유화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가득했던 곳이라니.
노래는 놀랍게도, 그 가사를 모르고 들었더라면
편안한 곡이라고 생각이 들만큼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분노, 적개심의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고마워요.
내 약함을 알려주어서. 힘을 길러야 함을 알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추함을 주어서. 아름다움을 갈망하게 되었어요.
고마워요.
쓴 맛을 보여줘서. 잠의 달콤함을 알게 되었어요.
..

라는 식의 가사로 이어지는 이 노래를,
가슴 아프게 들었다.
오히려 가수의 절제된,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에
프라하 시민들이 갈구하는 자유화가 더 간절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넷, 중국의 유럽 사랑 그리고 안타까움

정말이지 요즘에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가 영화촬영지의 꽃으로 부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인도영화 <Bang Bang>을 봤었는데요, 거기서 킬러인 주인공과 여주가 세계여행을 언급하면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로서 프라하에 가거든요. (황당무게한 줄거리에 수억의 돈을 어떻게 쏟아부었는지 궁금하시다면, 인도의 매력적인 영상미를 보고 싶으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아예 전체 배경이 프라하였습니다. 심지어 영화 줄거리 배경에도 체코 - 중국의 국제 연애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1950년대에 프라하의 의사와 만나 사랑에 빠진 란신. 60여년이 흐른 후 란신의 손녀인 진티엔이 프라하에 사는 중국인 남자와 만나 사랑하면서, 할머니의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중국인 남주는 또 프라하 여자 사이에서 낳은 혼혈아 딸이 있거든요. 

중국인들의 최근 결혼사진 촬영 트렌드가 유럽의 유명한 건물들 앞에서 야외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 주어허랑 CNN으로 뉴스를 보는데, 앵커가 '중국인들의 유럽 사랑'이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보도하더라고요. 중국인들이 추운 겨울날 턱시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런던의 빅벤, 국회의사당 앞에서 로맨틱한 포즈를 취하는 것을 보는데 정말 중국인들 대단하다..;;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난 주 처음 알게된 독일친구 스테이시와 중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스테이시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으로 수천년 역사로 중국이 쌓아두었던 그 모든 소중한 문화와 지식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것을 안타깝게 말하더라고요. "역사를 알면, 후손들도 그 나라의 미래를 어떤 정신으로 이어가야 하는지 알 수 있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의 영향 중 두 가지를 발췌해보았습니다.

전통 도덕의 붕괴[편집]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문혁 지도부는 사람들이 문화적 전통들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것은 "비림비공" 운동때 더욱 강조되었다.마오쩌둥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들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 그리고 사법기관을 넘어섰다. 중국의 전통 예술과 사상은 무시되었고, 그 자리에 마오쩌둥 사상이 차지하게 되었다.

문화 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편집]

문혁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 공예품들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 서양의 목격자들은 중국 역사의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한다. 또한 이런 파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들은 문화 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기도 한다.


저역시 한국인의 정체성 위에 세계의 지식을 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후기 쓰려다 삼천포에 빠진 포스팅
지금은 11시 30분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p.s. 매월 10일은 월급날. 오늘 영화표 이외에 지른 것들. 




2015년 2월 8일 일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중국 생활의 편리한 점 세 가지 : 인터넷 결제, 이동통신사, 포장문화


중국 생활의 편리한 점 세 가지 


하나, 중국의 인터넷 결제가 좋은 이유는 물건을 받고 나서 결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쿤치가 메이주 대리점에 직접 방문하고 나서 서비스에 무척 불만족하고는, 차라리 메이주 핸드폰을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쿤치: 제가 오늘 주문해서, 내일 이벤트홀로 배달되게끔 할게요.
에바: 응? 그럼 네가 돈 내야되는 거 아니야?
쿤치: 아니에요. 물건 받으면서 돈 내면 돼요.
에바: 카드도 되는거야? 카드, 현금으로 같이 내야할 것 같아서.
쿤치: 네, 둘 다 낼 수 있어요. 우리 이벤트 시작이 2시니까 1시에 배달되게 하면 되죠?
에바: 응

긴가민가 했습니다. 다음 날, 차이나방 이벤트가 시작되고, 무척 정신이 없는 가운데 과연 이 100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택배 아저씨가 나를 찾으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을 주문한 것이므로, 핸드폰이 없었습니다.) 로비에서 '유채원'씨가 누구죠? 묻는데, 그날 이벤트홀에 처음 온 저를 누가 아느냐는 말이죠.

엠마: 에바, 네 핸드폰 도착했어?
에바: 아니, 아직..
엠마: 괜찮아. 주문자 이름으로 현재 택배기사가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배송현황을 볼 수 있으니까.
에바: 뭐 정말?

정말이었습니다. 이벤트가 한창 진행중일 때, 쿤치가 저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쿤치의 핸드폰으로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왔나봅니다.

택배아저씨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주 MX4를 소중하게 건내받았습니다. 오늘 현금카드의 잔액을 확인한 결과 2474위안이 남아있었고, 제가 지불해야 하는 돈은 2499위안이었습니다. 저는 2470위안은 카드로, 29위안은 현금으로 지불했습니다.
쿤치는 핸드폰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며 포장을 뜯어 핸드폰을 켰습니다. 모든 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택배아저씨께 괜찮다는 사인을 해보였습니다.


즉 정리를 하면,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로 주문 가능.



물건 수령



물건 상태 확인



결제



택배기사 작업 완료



둘, 중국의 이동통신사는 놀랍게도, 주말에도 영업을 한다. 


한국의 이동통신사 근무시간은 분명히 평일 오전 9시 ~ 오후 6시까지 근무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요, 중국의 경우에는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근무를 합니다. 

금요일 밤

유에팅: 오, 에바. 핸드폰 샀네!
에바: 응 메이주로 샀지.
유에팅: 자, 빨리 번호 등록을 해야지.
에바: 응, 근데 지금 6시 반이면 너무 늦은 거 아냐?
유에팅: 아냐, 지금도 열었어. 그리고 오늘 아니더라도 내일이나 모레 가도 돼.
에바: 뭐? 주말에도 이동통신사가 문을 연단 말이야?

일요일 낮

오늘 메이주 핸드폰에 번호를 연결하기 위해 Unicom 대리점에 찾아갔는데, 정말 세 창구의 여직원이 모두 제대로 주황색 리본을 가슴에 달고 머리는 깔끔하게 올려묶고 저를 맞이했습니다.



덕분에 감격적이게, 핸드폰의 배경화면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핸드폰이 없어진지 정확히 13일만의 일이었습니다. (메이주 폰 구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저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는 외모로도 행동으로도 중국인으로 착각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셋, 중국에서는 먹고 남긴 음식의 포장이 무척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문화이다. 

"푸우위엔, 따빠오!"

음식을 주문할 때보다 더 당당한 이 한 마디.
심지어 제가 얼마만큼의 음식을 남기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제일 적게 남겼을 때는 동그랑땡 두 개를 남겼을 때였는데, 이와도 상관없이 포장을 해갔습니다.
포장을 하기로 하면, 서로간에 전혀 미안하거나 눈치볼 것이 없는 것이, 저는 포장을 할 때 1위안을 지불해야 하고, 직원은 저에게 투명 플라스틱 용기, 비닐봉지, 나무젓가락을 건내줄 뿐 직접 싸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중국에서 더 음식의 양이 많이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음식을 버리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8명이서 식사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9명이서 회식을 갈 때에도 남은 음식에 대해서는 누가 가져가는 것을 정하기 전에 일단 포장을 하고 봅니다.


이 고마운 포장문화 덕분에 저는 '음식을 남기면 안돼!' 하면서 양조절에 실패하던 과거와는 달리 제가 먹고 싶은 만큼만 먹고 나머지는 여유있게 싸갈 수 있어서 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점심은 직원들과 바깥에서 사먹고 남은 음식을 싸서 그 날 저녁에 먹거나, 그 다음 날 아침에 원래 있던 제 한국 반찬들과 같이 먹으면 돈 절약도 많이 되더라고요. 지금 제 냉장고에는 각기 다른 중국 반찬이 세 개, 한국 반찬이 세 개입니다.




2015년 2월 6일 금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중국의 데모데이에 가서 깨달은 것 세 가지 : 차이나방, 핀테크, 중국 스타트업


중국의 데모데이에 가서 깨달은 것 세 가지





차이나방(ChinaBang)은?

테크노드에서 매년 주최하는 연간 시상식 이름이다. 차이나방은 2012년에 시작해 올해로 3년이 되었다. 2012년에는 베이징에서 14개의 스타트업 중 최고의 스타트업을 가리는 방식이었으나, 2015년 현재는 중국의 다섯 개 도시에서 각각 지역단위의 데모데이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최고의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이 되었다. 누리꾼의 인터넷 투표가 60% + 심사위원의 평가가 40%이다. 참고로 차이나'방'은 돕는다 帮는 뜻이다. 

ChinaBang conference, an annual two-day event with a focus on local startups, i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 was held last weekend in Beijing.


하나, 차이나방의 영향력, 그 범위와 그 깊이에서 놀랐다.


우선 그 범위로는, 올해 베이징, 상하이, 홍콩, 항저우, 그리고 청두에서 차이나방을 개최한 것. (빨간 동그라미 5개) 올해 혹은 내년에 차이나방이 열릴 5개 도시도 이미 선정되었다.  (주황색 동그라미 5개)

그 깊이는 오늘 원활하게 진행된 이벤트,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것을 뛰어넘는 높은 관심과 참여에서 느낄 수 있었다. 60개 정도의 의자를 설치해서 대략 100명 정도가 모인 것 같다. 그래, 많지는 않지만 이게 지역별 예선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이미 3년 째 이 이벤트를 해온 사람들의 노련함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다. 이벤트를 준비하는 우리 뿐만 아니라, 심사위원, 발표자, 이 이벤트를 보러온 보통 사람들까지. 다들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 찾아왔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고 왔으며, 그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호기심의 눈으로 이 이벤트를 지켜본 건 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이벤트의 한국인은 3명이었다. 나 그리고 한화에서 오신 두 분. 

오늘 데모데이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최소 무게와 부피와 걸맞게 최소의 편안함을 주는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심사위원부터 관람객들이 모두 채워앉았고, 의자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전문업체가 와서 정성스럽게 케이터링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설마 이걸 다 먹을까 의심했었는데, 커피, 케이크, 파이, 과자 등등이 이후 거의 다 깨끗하게 비워졌다. 뿌듯했다. 뭐랄까. 우리가 준비한 그릇보다 더 넘치게 사람들이 참여하고 열정을 보여준 이벤트여서. 


둘, 상하이 그리고 핀테크

오늘 피칭한 10개의 스타트업 중에서

HW / SW : 2명이 하드웨어, 8명이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첫 번째는 색깔이 변하는 스탠드, 두 번째는 배터리 충전용 스쿠터였다.

8명의 아이템 = Fintech 5 + 크라우드펀딩 1 + 모바일 광고 최적화 1 + 여행 1 

역시 상하이는 핀테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데모데이 심사위원 중에도 Startup Bootcamp Fintech의 싱가폴 담당자 두 분이 오셔서 엑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하셨으며, 다른 한 발표자가 비트코인의 장점과 그 가능성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진 이후에 데모데이가 시작된 것이다. 

상하이에서 핀테크가 잘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상하이라는 도시 자체가 '금융'에 두는 무게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상하이의 골간 산업은 3차 산업으로 특히 금융업, 부동산업, 보험, 운수업 등이 상하이 경제의 핵심이다. 참고로 상하이의 금융 무역 중심 지역은 2015년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무역, 금융의 중심으로 우뚝 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상하이는 우선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역사적으로 상하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시기는 북송시대인 1074년 상하이전이 설치되면서부터였고 이 시기에 특히 수군, 상업이 번성했다. 이후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난징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하이 항구도시를 개방하기에 이른다. 1845년 설립된 영국 조계사를 시작으로 황푸강변의 와이탄은 번드라고 불리는 금융 빌딩이 늘어서게 되었다. 현재 푸둥신취의 루자주이는 상하이의 새로운 금융 무역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출처: 이원주, <Justgo 중국>, 시공사, 2014, 211쪽, 224쪽

* 상하이 그리고 핀테크 참고기사: 

[세계로 뻗는 금융한류③]중국엔 '핀테크 구호'가 없다..자생적 강국 성장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A21&DCD=A00102&newsid=01207046609240672

전자상거래 활발한 중국의 교훈
금리 통제· 신용카드 발급 장벽 뚫고 고객 필요에 의해 스스로 발전
알리바바는 '알리페이' 발판 삼아 자산운용사·개미금융까지 영역 확대 결제대행사 넘어 금융사로 성장
한국 금산분리법, 핀테크 활성화 막아 인터넷전문銀 한해 규제 완화 검토

큰 나라 중국의 금융 기술 엿보기 중국 핀테크 동향





셋, 중국의 스타트업

오늘 피칭한 10개의 스타트업, 그 통계를 내보자. 

중국인 여부 : 95%가 중국인이었다. 

미국인 시민권이 있는 중국계 여성창업가가 있었으므로.

성비 : 9명은 남자, 1명은 여자 

이 여자는 정말 창업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여자인 것 같았다. 버킷리스트 캠페인 성공에서 착안해 캠페인 크라우드 소싱 아이템을 소개한 이 여자, 그녀의 팀원들과 조언자들의 이력은 더 무서웠다. 당시 내가 에버노트로 메모한 것을 보면.

코파운더 둘 다 예일 대 나오고 philanthropy in motion이라는 데서 일했구나. 이 여자는 미국 출신에 CEO& BD, 공동대표인 여자는 베트남인이고 Product lead네. 
난양이 좋은 데 인가봐. 홍콩 대학교. 알리바바에서 일한 사람. Advisory를 보면 코카콜라의 미디어 마케팅 조언자. 다른 한 남자는 DELL, hp … 

참고로 베이징에는 여성 창업가가 아주아주 많다. 테크노드에서 시리즈물로 이 여성창업가들을 다룬 적도 있다. 테크노드 주최로 이 여성 창업가를 모아 X FOUNDER이라는 밋업을 매달 열고 있다. 

언어 : 6명은 중국어, 4명은 영어

참고로 심사위원 중 아예 중국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9명 중의 1명 뿐이었다. 

* 발견한 특징
-로고에 귀여운 캐릭터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아이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판다 캐릭터, 뚱뚱보 캐릭터가 등장했다. 
-회사명은 대체로 두 글자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중국어로 발표하면, 중국어로 코멘트. 영어로 발표하면, 영어로 코멘트가 나오는 식이었다. 
-외국 대학을 나온 것은 영어로 발표한 네 사람 중 두 사람 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 중국 내의 대학을 나왔으며, 북경대, 칭화대, 복단대 출신은 없었다. 
-피칭에 있어서는 중국인 창업가들의 열정이나 그 기술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PPT는 텍스트가 아주 많고, 세련된 터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슬라이드에 중국어 그 밑에는 영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줄글로 된 텍스트가 많았고, 글자체는 대체로 영어 신명조만 사용하는 것 같았고, 글짜 색깔과 배경 색은 다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원색들이었다. (빨강, 노랑, 하양.. 형광봉 색깔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기]


이벤트장으로 이동하는 길. 지금은 오전 10시 30분.
택시비 66위안

테크노드에는 테크크런치, 차이나방, Xfounder 이벤트가 있다. 차이나방 이벤트 담당은 베이징에 있는 샤오밍과 루루가 담당하고 있다. 
다른 도시 투어는 두 사람이 같이 도와서 하는데, 상하이 데모데이는 원래 상하이 회사의 멤버들이 도와줄 수 있기 때문에 샤오밍만 상하이에 내려왔다. 

여러 번 이벤트를 준비해본지라 Innospace에 도착하자마자 스탠딩포스터를 설치하고, 의자를 설치하고, 프로젝터가 잘 되는지 확인, 케이터링 업체들을 지시하는 것까지 도가 튼 것 같았다. 이벤트 중에는 세심하게 심사위원들, 발표자들을 챙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옆에서 쿤치랑 왕핑이 도왔다. 특히 쿤치가 길이가 맞지 않는 스탠딩 블라인드를 고치기 위해 여러번 나사를 풀었다 조이며, 포스터 길이를 조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벤트 끝나고 사무실 가는 길. 지금은 6시.
택시비 80위안
오는 길에 뉘치엔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뉘치엔은 테크노드 중문판의 Chief Editor이다. 베이징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후 NetEase에서 3년 동안 기자로 일하다가, 회사가 상하이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후 테크노드에 합류했다. 테크노드에 2012년 합류할 당시 회사는 그녀까지 4명 밖에 없었다. 그 중 두 명은 지금 회사를 떠났으니, 대표님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직원. 

에바: 뉘치엔, NetEase에서 일할 때가 좋아. 아니면 지금이 좋아? 
뉘치엔: 지금. 나는 스타트업이 좋아. NetEase는 대기업만 다루거든. 
에바: 스타트업이 왜 좋아? 
뉘치엔: 창업가를 만나는 게 좋아. 그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생각이 좋아. 

*뉘치엔과 대화하며 알게 된 것

Baidu는 검색엔진
QQ, Sina, Sohu, NetEase (163.com)은 인터넷포털사이트
门户网站 [ménhùwǎngzhàn] 



辛苦了!

이제 밤 12:44분이네요 ㅠ
모두들 안녕히 주무세요!

2015년 2월 5일 목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중국산 핸드폰을 사고 싶다 : 메이주 MX4



중국산 핸드폰을 사고 싶다
: 메이주 MX4




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아이폰6를 도둑맞았습니다. 저는 상하이, 한 사람은 발리, 한 사람은 버클리에서요. 핸드폰이 없어진지 이제 열흘이 지났고, 애플스토어에 가서 그 사람이 오프라인 상태인 이상 찾을 방도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을 사기로 했어요. 중국산으로요. 중국산 핸드폰이라니, 못 믿겠다고요? 현재 샤오미, 화웨이 그리고 메이주가 얼마나 무섭게 핸드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양뿐만 아니라 핸드폰의 질에 있어서도 이제 해외 제조업체들에 뒤지지 않아요. 

지난 번 베이징에 갔을 때 Ex테크노드 기자님에게서 메이주 핸드폰에 대한 수많은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저는 잠정적으로 메이주를 사기로 결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유에팅의 노키아 윈도우 8폰을 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져서 저희 기자들에게 물어보기로 했어요. 중국어는 유에팅이 옆에서 번역하면서 알려준 것입니다. 


에바: 질문이 있어. 너희 생각에는 어떤 중국산 핸드폰이 좋은 거 같애? 
나한테 중요한 건 빠른 속도랑 사진의 퀄리티야. 

줘허: 애플꺼 사.

루루: 샤오미가 괜찮아. 

에바: 애플은 좀 위험한 선택인듯. (이미 저와 한 분의 아이폰6가 도난당한 상태)

왕량: 메이주가 사실 괜찮은데.
MX4 말야. 

류텅: 아이폰을 살 게 아니면, 넥서스5를 사. 한국 LG 같애. 제일 중요한 건 구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거. 

에바: 오 다들 고마워!

류텅: 만약에 가격이 낮은 게 좋다면 Sailfish OS의 Jolla Phone이나 Firefox OS의 Geeksphone, E-ink의 Yota Phone도 괜찮아. 



마침 오늘 플래텀에서 메이주 인터뷰기를 올리셔서 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꼭 메이주 MX4 Pro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 중에서 메이주에 대한 이야기
다른 이야기지만, 샤오미를 애플 짝퉁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직접 느낀바로는 샤오미는 이미 ‘브랜드’로 인식되는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메이주는 ‘제2의 샤오미’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샤오미의 전략을 따라한다는 시선도 있다. 이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메이주는 화웨이나 샤오미보다 먼저 스마트폰을 개발해왔다. 샤오미가 글로벌 시장에서 빠르게 선전할 수 있었던 건 로우엔드 전략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하이엔드 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샤오미가 저가폰 전략으로 성공하는 사례를 보고 로우엔드 제품을 추가로 라인업 한 것이다. 즉, 메이주는 샤오미보다 더 넓은 제품군을 제작, 개발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자에게 최상의 모바일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MX4에 대한 이야기
메이주의 자체 R&D 개발 역량은 그 어떤 기업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이 MX4를 개발하였는데, 소비자들로부터 제품 성능 뿐만 아니라 제품 디자인 부분에서도 애플 아이폰6보다 앞섰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 메이주 본사에 상주하는 R&D 연구인력이 1000명 이상이다. 인하우스 디자인팀까지 충분히 갖추었고.
메이주의 최신모델인 ‘MX4 PRO’는 현재 중국에서만 판매되고 있는 기종이다.
운영체제는 Android v4.4.4 (KitKat)이며, 샤오미와 마찬가지로 메이주 자체 커스텀롬 Flyme 4.0이 적용되어 있다. 5.5인치 정전식 스크린 방식이며, 멀티터치 및 지문인식 기능이 제공된다(자세한 사양은 아래 이미지 참조).
가격은 홍콩달러 기준 16기가 모델이 3299달러(한화 42만원), 32기가 모델이 3549달러(한화 49만원)에 책정되어 있다. MX4(출시가 29만원 선)에 비해 가격이 대폭 상승했음에도 여전히 타기업 동종제품군에 비해서 저렴하다.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춘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생활비가 얼마 안 남아서 아마 월급날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ㅠ 그래도 MX4는 꼭 사고 말리라,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상하이 에바노트] 1월 마지막 날, 노오란 여인을 그리다



노오란 여인을 그리다



Today I drew a yellow woman, and thought, probably I'm Leonardo Davinchi. 

추운 사무실 안에서 차가운 손끝으로 타자를 두드립니다. 하지만 30분 전에 먹은 토마토 북어국과 멸치반찬에 먹은 따뜻한 밥 덕분에 뜨뜻한 배를 안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글을 씁니다. 죄송해요, 오늘 작정하고 제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로 인해, 제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거든요. 오늘 Painting 수업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노오란 여인을 그리고 왔어요. 그 4시간의 이야기에 대해 차근차근 들려드릴게요.

오늘 아무런 일정도 없었어요. 엄마가 상하이에 오셔서 같이 관광하게 될 줄 알았는데, 패키지 여행으로 그것도 제가 사는 집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호텔에 머무르시거든요. 엄마 말로는 제가 주말에도 일하는 줄 아셨답니다. (뭐야, 네 아빠는 토요일에도 일하시더만.) 결국 이번 주말도 유채원이랑 놀게 되었습니다.

밋업을 한 번 가고 싶던 터라, 오늘 있는 밋업 목록을 보다가 Painting 밋업이 있었습니다. 진짜 이 밋업에 참석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실제 밋업에서 사람들이 Painting하는 모습이 예쁘게 사진에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가격은 52$. 내가 그린 그림을 가져갈 수 있고, 사진도 찍어주고, 커피도 주고.. 이런 요소들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저는 사진에 집착이라 할 만큼, 큰 중요성을 두거든요.) 이 밋업에 꼭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Changing Rd역에서 내려서 세 사람에게 길을 물어서 가까스로 밋업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메이는 저를 친절하게 맞으며 먼저 따라 그리고 싶은 그림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70장 정도의 그림더미가 폴더에 꽂혀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그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모두들 견본을 보고 그리는 형태였습니다.

저는 오기 전부터 노란색을 많이 써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옷을 사도 노란색을 꼭 생각하고 싶다고 나가서는, 늘 노란색 마음에 드는 옷이 없어 다른 색 옷을 사오기 때문에 오늘 유독 옷장에 가득 들어찬 검은 계열의 옷들이 답답했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는 노란색을 많이 쓰리라 생각해놓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그림들 중에서 노란 색이 많이 쓰는 풍경화, 그리고 노오란 여인의 초상화를 골라두었다가 노오란 여인을 선택했습니다.

메이: 음? 너 처음 온 건데 이 그림은 너무 어렵지 않을까? 색깔이 무척 다양하잖아.
에바: 그래도 노란색이 많이 들어가고, 꼭 사람을 그리고 싶어서. 잘 보면 스케치는 단순한 편이야.



저는 한 수염난 흑인 옆에 앉았습니다. 이젤에 걸친 하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손에는 지우개, 연필이 쥐어졌습니다. 제가 선택한 그림을 다시보니, 제가 최근에 찍은 프로필 사진처럼 여인은 진지한 표정의 옆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의식 중에 그림에 자신을 내면화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메이: 자, 그림을 봐. 이 여인의 구도를 볼 때 세로로는 1:1:1로 나누고, 가로로는 1:5:1로 나누면 좋겠다.

'아, 그림도 막 그리는 게 아니고 이렇게 처음에 구도를 정하는구나.' 저는 여인을 스케치북에 스케치했습니다.



유나: 음, 이 여자는 옆모습이잖아. 그러면 눈코입이 이런 삼각형을 그리지? 그리고 눈 부분을 부채꼴로 그리면, 눈의 위치가 이렇게 되어야겠지?

유나는 제가 스케치한 눈의 위치를 재조정 해주었습니다.

유나: 자, 이제 쓰지 않은 선들은 지우개로 지우면 돼.

저는 쓰지 않을 선들을 지웠습니다. 그 때

메이: 지우개로 지울 필요 없어. 어차피 물감을 씌울 거잖아.

저는 큰 붓과 작은 붓을 하나씩 고르고 팔레트에 물감을 짰습니다. 치약만큼 큰 물감에서 흰 색, 노란 색을 짜고, 손가락만한 작은 물감에서 검정, 빨강, 초록, 파랑, 황토색을 짰습니다. 메이가 신문지와 종이컵에 담긴 오일을 갖다주었습니다.

에바: 음, 붓이 빳빳한데 물에 풀어야 하지 않을까?

메이: 아니야. 오일페인팅은 물이 필요없어. 신문지랑 오일만 쓰는 거야.

저는 하얀색, 노란색, 그리고 살색으로 먼저 칠을 했습니다. 이렇게 혼자서만 하다가 일을 그르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이가 주변에 제가 물어볼 수 있는 전문가들을 몇 사람 소개해주었는데 이렇게 혼자 자신감에 넘쳐했다가는 많이 못 배울 것 같았습니다. 오늘이 첫 날인만큼 도움을 청하자 싶어, 제 앞으로 유나가 지나갈 때 유나를 붙잡았습니다.

유나: 이런, 붓이 딱딱하네. 오일에다가 이런 식으로 붓을 부드럽게 하면 돼.

유나는 빨간 색 부분을 칠해주었습니다. 눈 부분의 빨간 물감과 눈가의 살색 물감을 섞는 것도 시범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유나: 그 다음에 머리칼을 칠하면 되겠네. 검정색 + 초록색을 섞어 짙은 초록을 만들면 되겠어.

저는 그냥 검은 색인 줄 알았는데 정말 다시 보니 김처럼 푸른 기가 있는 검정색이었습니다. 저는 검정색과 초록을 섰어 머리칼을 칠했습니다. 그러던 사이 메이는 다른 일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이제 정말 캔버스와 저만의 시간이었습니다.

페인팅은 정말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제 성격과 아주 잘 맞았습니다. '완전히' 혹은 '절대'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잘못 붓을 댄 부분은 원래의 색과 섞여 더 극적인 색깔 배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과감하게 여러 곳에 묻혀둔 빨강, 초록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원래 있어야 할 색들 - 살색, 상아색들과 멋지게 어울렸습니다. 세심한 붓터치를 하는 사람이 보면 '저렇게 폭력적이게 붓을 다룰 수가!' 하고 기겁할 만큼 대담하게 푹푹 팔레트에 물감을 묻히고는 그림에도 똑같이 푹푹 찍어대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그 사람 성격이 드러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일단 지르고 보는 제 성격대로 제 그림에는 '반드시 이래야 해!'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견본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데 있어서 그 과정은 제 마음대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 때 유나가 저랑 흑인 친구에게 다가왔습니다.

유나: 자, 이 시점에서 멀리서 그림을 한 번 들여다 봐. 분명 가까이서는 볼 수 없던 부분이 보일 테니까.

저는 멀찌감치 서서 제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견본에는 극적으로 표현된 초록색 그림자가 제 그림에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간혹 멀리 떨어져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구나 싶었습니다. 초록색 부분을 더한 다음, 이제 정말 디테일 이외에는 다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제 손은 물감으로 더러워진 상태였습니다. 제 스웨터에도 초록 물감이 묻었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자국'인 마냥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흙장난을 하듯이 마음껏 더러워지는 것이 기분 좋았습니다.

저는 물감 묻지 않는 손등으로 버튼을 눌러 종이컵을 하나 쥐고는 커피를 내렸습니다. 거품이 올라간 커피는, 그것도 일의 상당부분을 끝내고 나서 그 다음 단계에 이르기 전에 마시는 지라 더더욱 맛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손이 바쁘기 때문에 눈이 그동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 맞은편에서 그림을 그리는 여자애 옆에 앉았습니다. 풍경화를 그리는 이 여자애의 그림은 정말 섬세함 그 자체였습니다. 사각형 팔레트를 물감들로 얼마나 요령있게 자리 배치를 하는지 보고 놀랐습니다. 물감을 세세하게 섞어 새로운 공간에 자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제 팔레트는 그야말로 재래시장인 반면, 이 친구의 팔레트는 백화점 1층의 스카프 매장 같았습니다. 그 때 유나가 캔버스로 다가왔고, 저는 후닥닥 제 캔버스 앞에 앉았습니다.

에바: 이제 디테일에 들어가도 될 것 같아.

유나: 응, 눈코입부터 하는 게 좋겠는데.



유나는 디테일 붓을 두 자루 가져왔습니다. 세밀한 붓으로 검은색을 묻혀 유나는 과감하게 눈을 그렸습니다. 그 다음 두터운 붓을 세워서 강한 선을 강조했습니다. 유나가 그린 눈을 보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나중에 눈썹도 한 선을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유나는 능숙하게 틀린 선에 살색 덧칠을 했습니다.

유나: 자 나머지는 네가 그리면 되겠다. 아, 그리고 눈알을 잘 보면 완전히 흰 색이 아니고, 하양+초록이야.

유나가 가고 나서 저는 눈, 코, 입을 마저 그렸습니다. 유나가 그린 눈에 하얀 동공을 그리고 나니 비로소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오란 여인의 입술은 아주 도톰하니 매력적이었습니다. 제가 그린 입술은 그에 미치지 못했지만 일단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는 덤불도 그리고, 여인의 옷에 주황색 무늬도 넣었습니다. 작은 붓을 쓰니 더 재미있었습니다. 세심하게 선을 그리다가도 그 주변의 색깔과 오묘한 섞임을 연출하고. 그림도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유나가 다가왔습니다. 유나는 제가 포착하지 못했던, 그림자진 얼굴 부분에 초록색 명암을 더 넣어주고, 얼굴 전체적으로 주황색 + 갈색을 더해 입체감을 더해주었습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었습니다. 유나는 입술도 파랑과 하양으로 멋지게 연출해냈습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얼굴은 거의 완성했다고 주변 디테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유나는 주인공의 얼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이 그림의 메인은 이 여인이지.'

유나: 자,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네 이름을 싸인할래?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하얀 붓으로 끄투머리에 EVA라고 썼습니다. 그림에 비해 제 글자체가 무척 어린아이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더 신경 쓰고 싶은 부분이 있었기에 붓을 들어 노란 꽃 점들을 찍고, 입술 부분의 붓터치가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입술의 질감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림의 마지막에는 제 중지에 묻은 하얀색으로 이곳저곳 색을 섞으며 부드럽게 다듬었습니다. 중지가 군인옷 색깔이 되었을 때에야 저는 마침내 완성했다고 생각이 들어 손을 뗐습니다.

저는 주변의 여자애에게 제가 그린 그림과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아아, 그 행복감은, 뿌듯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유나가 매주 일요일 2시 ~ 6시에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다음 주에도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정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상하이라는 이 장소가 제 자아실현의 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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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릴 적 꿈은 화가였습니다. 자기의 꿈을 그려보세요, 하면 늘 한 손에 팔레트를 들고, 머리에는 프랑스식 베레모를 쓰고, 허리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이젤의 캔버스 앞에 선 한 여인을 그렸다. 6학년까지도 그렇게 그렸습니다.

하지만 5학년 때 화가라는 꿈이 무너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1년 6개월 살다가 서울 혜화 초등학교에 전학왔습니다. 미술 시간에 수채화로 정물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저는 눈 앞에 보이는 물통과 노란 국화꽃, 컵을 정말 충실하게 그려 색칠을 했습니다. '정말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없어' 하면서 일어나 친구들 것을 보러 다녔습니다.

우리 반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리기로 소문난 키 큰 윤지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그림을 보고서... 저는 화가의 꿈을 접었습니다. 그림그리는 친구가 으레 그렇듯 차분하고 얌전하게 혹은 태연하게 붓놀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은... 정말 깊이있는 명암과 붓터치가 어우러진, 객관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수채화 같은 것 배워 본 적 없습니다. 뎃생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미술학원이 지겨워 그만 두었습니다. 그렇게 화가라는 꿈과 멀어졌습니다.

그림을 다시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림 비슷한 것을 가까이하게 된 것은 정연이를 만나면서부터 였습니다. 고2때 만난 정연이와 단짝이되었는데, 정연이는 그 때 미대 입시 준비를 하면서 미술학원에 다녔습니다. (정연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사무실 자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정연이가 그린 양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정연이 동생 상수가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연필로 이렇게 살아있는 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지.')

문학시간에 한 번은 친구를 캐리커쳐 해보라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제가 정연이를 캐리커쳐했는데, 정연이가 처음에는 "야, 이거 뭐야!"하면서 제 그림을 고치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봐도 제 눈에는 정연이랑 똑 닮았는데. 특유의 똥머리, 강렬한 눈, 삼각형 얼굴, 몸매가 드러나는 교복 상의와 약간 도톰한 종아리까지.

며칠 뒤, 정연이 아버지 생신이 왔습니다. 정연이는 아버지와 자기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치, 조종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말하는 어린왕자처럼 단호하고 진지했습니다.

정연: 유채, 우리 아부지랑 영상통화했었잖아. 나랑 우리 아부지 좀 그려줘.

유채: 야, 네가 나보다 더 잘 그리잖아!

정연: 그 때 네가 그린 캐리커쳐가 어이없긴 했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내 특징을 잘 잡아냈었거든. 부탁해.

그 이후로도 정연이는 자주, 자기 캐리커쳐를 꼭 저에게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새로 산 연습장의 표지에, 혹은 자주 들여다봐야 하는 유인물 뭉치의 표지에.

저는 늘 귀찮다고 하면서도 정연이를 실망시키지 않게끔, 결국은 그려주었습니다. 그 과정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지만, 기뻐하는 정연이를 보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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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주일에 한 번은 그림을 그리게 될 생각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그리고 싶은 것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저희 회사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TECHNODE라는 마크나, 우리 회사 직원들이나. 왜냐하면, 그만큼 제가 회사를 사랑하거든요.

그리고 제 자화상이 그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리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그려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은 내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1 제 생일에 당시 영상고에 다니고 있던 예진이가 뎃생으로 제 초상화를 그려 가운데를 리본으로 묶어 저에게 주었었습니다. 새벽 4시까지 그렸다는 그 그림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2015년 1월 31일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만 두었던 시점은 2001년 9월입니다. 14년이 흐른 뒤 저는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문득, 영화 <노트북>이 생각납니다.

노아의 집에 온 레이첼은 자신을 위해 마련해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감동했습니다. 이른 아침, 나체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나무를 그리는 레이첼. 그리고 그 날 오후. 
노아: What do you want?
노아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레이첼에게 묻지만, 레이첼은 대답하지 못하고 차를 타고 그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리고 다음 날, 결국 두 손에 한 가득 짐을 들고 멀리서 부터 걸어오는 레이첼. 그리고 그런 레이첼을 웃으며 바라보는 노아.  

저는 상하이라는, 노아의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은 '표현'하는 일이고, 저는 이제 점점 더 이 일들을 잘할 수 있도록 2015년이라는 캔버스에 어렴풋이 그려진 스케치에 열심히 덧칠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은 서양에서는 레오나드로 다빈치, 한국에서는 세종대왕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전인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다빈치는 뛰어난 화가, 과학자, 발명가였으며, 세종대왕은 한글 뿐만이 아니라 장영실과 같은 발명가를 등용할 줄 알았고, 경석이라는 악기를 만드는 데도 지원해주었어요. 정말 팔방미인이었던 사람들이지요.

저도 다빈치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런 다양한 분야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제가 기사를 쓰는 과정에도 반영될 것 같아요. 다만 유나라는 가이드가 제 옆에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가이드가 있는 것처럼 제가 스스로를 콕콕 찔러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