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6일 수요일

[ISUP / 이스라엘 그녀의 체험기]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놀이를 생각하다.

잃어버린 놀이를 찾아서


네덜란드의 위대한 문화사가 하위징아 Johan Huizinga가 쓴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의 일부분이다. 
강신주 저자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304쪽에서 발췌했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는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1. 잔소리
 잔소리를 한다는 것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며 이로 인해 아이에게 어떤 행위는 의무로 부과된다. 잔소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격려와 칭찬일까? 

 하지만 이 격려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개인적으로 그리 좋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토플에서 스피킹 시험을 준비하는데 한 교수의 수업의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딸이 피아노를 치는 것이 대견해서 앞으로 피아노를 칠 때마다 10달러 씩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딸은 더이상 피아노를 치는 것이 이전처럼 즐겁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피아노를 치는 것에 대한 순수한 즐거움이 아닌, 의무감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는 방식을 보며 정말 신기했던 것은 쿨리 씨네 집에서 카우치서핑을 했을 때이다. 외동딸인 야엘은 아기천사를 떠올리게 할 만큼 사랑스러웠지만 정말 하는 짓은 미운 3살이었다. 특히 처음 보는 동양인인 나에게 3박 4일 내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물리 씨와 노아 씨의 반응이 더 인상적이었다.

야엘: 나 혼자 계단 내려갈 수 있어
노아: 그래 내려오렴.
야엘: 저 언니(에바)는 보지 말라 그래.
노아: 에바 씨 미안한데 차 안에서 기다려 줄래요?

 나는 내심 섭섭해하며 차에 먼저 탔다. 이 부모님은 내 체면을 생각하면서 야엘에게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거나 야단을 치지 않았다. (손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등.) 대신 차에 타서 "왜 에바 언니랑 안 친해지려고 하는 거야?" 라고 야엘에게 물었다.
야엘은 그저 동양인인 내가 낯설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야엘에게 억지로 "에바 언니랑 놀아." 하지 않고, 야엘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마음을 열기까지 다독여주는 부모님의 인내심이 보였다. 결국 마지막 날, 야엘은 자신이 이 닦는 자리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야엘은 정말 친한 사람에게만 자기가 이 닦는 모습을 보여준다.)


2. 여행
 나는 여행이 재미없어 지는 순간을 알고 있다. 관광을 의무감으로 느낄 때이다. 지난 체코 여행 때 나는 시내에서 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권 앞에서 고민하면서 괴로워했다. 나는 내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실 그 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저 책을 읽는 것이다. 체코에 와있으면서 움직이지도 않고 한 장소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니. 하지만 나는 그 날 책을 읽어서 무척 행복했다. 이것은 반대로, 여행을 의무감으로 느낄 경우 독서나 공부는 놀이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아주 조심스럽다. 

이스라엘 에일랏의 해질녘

3. 밥 먹기
 밥을 의무적으로 먹는 사람이 있을까? 스모 선수? 음식 빨리 먹기 선수? 식사가 즐거운 것은 그것이 놀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식사를 의무로 여기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밥을 아주 맛있게 잘 먹는다. 하지만 '이건 맛있는 음식이니 꼭 먹어봐야해.', '이건 몸에 좋은 음식이니 다 먹어야해.'라는 욕심과 '남기면 아까우니 다 먹어야해.'라는 의무감이 있어서 대체로 남들보다 많이 먹게 된다. 정말로 내가 식사를 즐거운 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맛을 음미하고,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며 놀면서 먹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식사의 금액이 나에게 그런 의무감을 더 부여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엄마가 맛있게 차려주신 다이어트 식단을 보면서 나는 내 한계효용이 체감했음을 알았다. 여느 때처럼 그 식사가 고맙고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남기면 안된다는 의무감에) 먹었을 뿐이다. 내일은 엄마께 아침을 차려주시지 말라고 해야 겠다. 

엄마가 야채와 과일을 썰고, 후라이팬에 두부를 부쳐주시는 수고의 과정을 내가 당연시 여기면 안 될 것 같다. 요리하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내 자신에게 과정의 수고를 알려주어야 하니까. 


한국에 귀국한 다음 날 아침 엄마가 차려주신 것. 
행복에 겨워서 먹었던 기억.

4. 글 쓰기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뭐랄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동안 글을 쓰지 않을 때도 있다. 그저 열심히만 살고 있을 때. 표면적인 것들이 나를 감싸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우스울 때 혹은 반대로 사치로 여겨질 때는 글을 쓰지 않는다. 
 글 쓰기가 나에게는 놀이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글 쓰기를 직업으로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글 쓰는 이로서의 의무감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가장 두렵다. 
 '책을 낸다' 라는 결정을 내렸을 때 책을 내는 데 수반되는 목적의식이 없었다. 나에게는 오로지 명성, 수익이 되는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반대로 나는 내 글 쓰기를 놀이에서 의무, 목적이 될 정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기사를 쓰는 것보다 블로깅을 하는 것이 그래서 더 즐겁다.)


책이 고플 때 김민준, 이기석 학생이 한국에서 선물로 가져온
책 두 권과 노트 두 권. 저 노란 노트를 특히 내가 얼마나 아꼈는지 모른다.


5. 운동
 어제 생각이 들었다. 요즘 웨어러블 기기가 나오면서 그 날 하루종일 내가 걸은 걸음 수나 시간을 측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웨어러블 기기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내 그만두었다. 내가 그 날의 걸음수나 칼로리를 파악하는 순간 나는 걷는 것을 의무감으로 느끼게 될테니까 말이다.

6. 행복
'행복하다'는 것이 놀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위징아는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는 순간 그것은 노동이고, 목적과 수단이 결합하면 놀이가 된다고 말했다. 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수당을 받기 위해 하위징어는 노역 일을 하는 노동자와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 아이를 비교하였다. 
 우리는 어느샌가부터 행복 자체도 목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행복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즉 '안정적인 수익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평안하게 사는 것'을 행복이라고, 그것에 다다르는 것을 의무감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면 행복이 무엇인지, 직접 탐구해나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모험을 하면서, 때론 실패를 하면서도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놀이이니까. 

알라딘의 창업가, 얀키 마르가리트 씨의 집. 
나는 보인다. 그도, 그의 아들도 자신이 사랑하는 일과
'놀고 있다'는 것이.
얀키 씨가 놀면서 만든 태양열 나무


7. 의무를 주는 것
 우리에게 의무감을 주는 것은 돈과 가정이 아닐까? '놀이'라는 것을 사치라고 여기는 때는 돈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생길 때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돈과 가정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돈을, 놀이를 하던 중 엄마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과일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떤지? 달콤한 사과를 아삭 한 입 베어 먹고는 이내 내가 집중하던 그 놀이에 다시 빠져버리는 것이다.
 가정 역시 그런지도 모른다. 가족을 내가 부양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이라는 게임판에서 함께 놀이하는 '플레이어'로 보는 것이다. 
 사실 나는 개별적인 '플레이어'로 길러졌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멋지다, 나는 더 위대한 사람이 되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8. 한계의 역설
내 삶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아. 나는 약자야. 가난하고, 허약하고, 젊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 <다윗과 골리앗>이다. 이게 위로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또 나는 엠마가 한 말을 기억한다. "제한시킬수록 창의적이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샤밧인 금, 토에는 일을 하지 않는다. TV, 컴퓨터, 핸드폰을 모두 끄고, 전등를 끄고 켜는 것조차 일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조건적인 '제한'이 그들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샤밧이 되면 이스라엘에는 승용차도,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는다.
운전을 절대 금지하는 욤키푸르에는, 이 텅 빈 고속도로 위를
어린 아이들의 자전거가 누비고 다닌다.


나는 이 세상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