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2일 목요일

[에바노트] 초록빛 이야기

아녜스 이모가 아산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수요일 저녁, 엄마와 저는 이모 병문안을 갔어요. 아산병원은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성내천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걸어서 갔습니다. 이웃이 아닌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아녜스 이모는 정말이지, 그냥 제 이모 같아요. 고등학교 때 같은 동네에 살았던 지형이네 엄마인데, 어쩌다가 엄마들끼리 더 친해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허물 없는 사이이기에(?) 엄마랑 저는 빈 손으로 병원에 갔습니다. 이모를 1년 만에 뵈는 것 같았어요. 그것도 작년에 아주 잠깐 집에 들리셨을 때 뵌 게 다였는데. 엄마도 계시고, 엄마 친구분까지 세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셔서 저는 이모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병실을 나와서 8명의 각기 다른 사람이 '손, 씻으셨나요?' 포스터에 나와있어서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목요일 아침, 저는 에콰도르 가방에 수성펜 한 자루, 적바림, 열쇠주머니, 그 날 매일경제 신문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제 생일부터 '우리 동네를 여행한다 혹은 산책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을 먹고 나서 산책을 하거든요. 앞서 갔던 세 장소보다도 이모 병문안을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아산병원으로 총총 걸어갔습니다. 엄마랑 둘이 갈 때보다도 수다가 없어 그런지 생각보다 좀 더 멀게 느껴졌어요. 엘레베이터를 올라가는데 옆에 선 의사선생님이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고 계셨어요. 저는 의사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Qure의 애플리케이션이 생각났습니다. 외람되지만 병원에 와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퍽이나 흥미로웠어요. 적어도 그렇게 많이 몸이 편찮으셔서 누워계시거나 휠체어를 타신 분은 한 분도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어제는 손을 씻지 않아서, 오늘은 손을 씻었습니다.

 병실에는 이모와 할머니(그러나 우리 할머니는 아닌)가 계셨어요. 오전 9시였고, 이모는 곤히 주무시고 계셨어요. 저는 이모를 깨우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그냥 가기는 아쉽고 해서
우두커니 서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모가 부스스 일어나시더랍니다. 이모는 사람 인기척에 깨어나셨다고 했어요. 정말 신기했습니다. 정말 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거든요. 사람의 인기척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사람의 기에 대해서.

 이모와 함께 지형이, 지민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모는 제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말을 걸고 잘 친해진다며 사업을 잘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저는 낯을 가리지 않는 대신, 어느 정도 사람에게 벽을 치게 되는 기간이 있는데..

 이모는 제가 가기 전에 미에로 화이바와 어제 엄마친구가 사오셨던 포장된 상자에서 여러 가지 쿠키를 집어서 챙겨주셨습니다. 저는 쿠키를 받고는, 우리 동아리 애들한테 나누어주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는 하나씩 까먹다 보니 다 먹게 되었어요.

 엘레베이터를 내려오면서 아주 예쁜 의사선생님을 보았어요. 저는 문득 아산병원의 색채가 주로 하얀색과 청록색임을 알아차리고는, 꼭 병원은 이 색깔들을 고수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들었어요. 붉은 색은 피 같고, 겨자색은 너무 지저분한가? 생각하며, 진정으로 환자를 행복하게 할 아름다운 병원은 없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적바림: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글로 적어둠. 혹은 그런 기록

*인기척: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소리나 기색


 금요일 아침, 오늘은 날씨가 그리 좋지 않네요. 소파에 앉아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지나는 차들, 지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젖어있다가 '이런 풍경을 바라보아서는 좋은 생각이 날 수가 없어.' 생각이 들어 다시 어제와 똑같은 짐을 싸서 집을 나왔습니다. 쌀쌀해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는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를 더 좋아하거든요. 어제처럼 나무가 우거진 길을 지나고, 구름다리를 건너 병원에 왔습니다. 오늘은 육교가 끝날 때 즈음의 얇은 대나무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11층에서 내려서 우선 손을 씻으려고 했는데 바퀴가 달린 링거대를 끌고 운동을 하고 계시던 이모와 맞닥뜨렸어요. 마침 지민이랑 할머니가 왔다갔다고 하시더라구요. 이모와 함께 병실로 돌아와서 조금 어색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내 제 근황들을 말씀드리면서, 제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까지 털어놓게 되었어요. 이렇게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이모: 채원아, 어차피 일은 혼자해야 하는 거야. 남과 같이 일한다고 해도 결국 일은 혼자 해야 하지.

이모: 채원아, 꿈꾸는 사람은 외로운 거란다. 같이 꿈꾸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렴. 그러면 돼.

이모: 채원아, 너는 이것저것 다 잘하고 싶지? 다 완벽할 필요 없어. 그리고 지금 하는 것을 경험 저축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연륜이 쌓이면 저축한 경험들이 저절로 배어나올거야.

이모: 너희 엄마가 그러시더라. 나는 우리 딸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니야 언니, 채원이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커. 그러니까 얘 하고 싶은 거 언니가 잘 응원해줘.

 엄마가 이모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저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엄마는 저랑 같이 살고 싶다고는 하셔도 한 번도 저한테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었는데 이모에게는 말씀하셨나봐요.
이모는 도라야끼라는 일본 빵과 냉장고에서 마시고 싶은 것을 꺼내가라고 하셨어요. 저는 오렌지 주스를 꺼냈습니다. 아침을 먹은 후라 허기가 지지 않아 저는 그것들을 가방에 넣었어요. 좀 더 묵직해진 가방만큼이나 채워진 마음을 안고 저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밖에 나오니 여우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구름다리를 건너며 저는 늘 바라보던 한강이 아닌,
하수처리장 쪽을 바라보았어요. 이 방향이 더 추하다고 생각해서 늘 한강 쪽을 바라보며 건넜던 것인데 오히려 이 방향의 풍경이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성내천을 감싸고 있는 광활한 수풀들 때문이었습니다. 문득 저 수풀에 파묻힐 듯 편하게 저기 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초록색 수풀이 무척이나 건강하고 넉넉하게 보였습니다. 빨간 신의 뒤꿈치부터 앞꿈치까지 야무지게 발을 땅에 디디며 집에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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